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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 한국의 빌브라이슨이랄까

by 이제이제이 20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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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님이 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라는 책을 읽었다. 요즘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이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는 제목은 아니었지만, 원래 보고 싶었던 책인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 회사 도서관에 없어서 할 수 없이 단 한 권 비치되어 있는 다른 책을 집어들고 왔다.

사실 이 책은 어느 주말, 남편이 거실에 태평하게 드러누워서 먼저 읽고 있었는데, 주말에 애들한테 이리저리 불려다니던 나를 갑자기 불러세워, 책이 너무 재밌다며 이 칼럼만 먼저 하나 읽어보라고 책을 넘겨줬다. 누워서 손을 쭉 뻗는 남편에게 책을 건네받자니 알 수 없는 얄미운 기분이 들긴 했지만 평소 보통 뭘 읽어보라거나 해보라고 권유하지 않는 성격의 남편이었기에 그 자리에 서서 바로 읽었고 기대 이상으로 정말 기발하고 재밌는 칼럼이었다.

제목은 '추석이란 무엇인가'.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이 나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때. 취직은 했는지, 결혼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하며 물어올 때,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주시죠' 라고 답하기 보다 이렇게 본질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게 좋다고 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당황한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라고 물으면 '당숙이란 무엇인가?' 라고 대답하고, '결혼은 할 거니 말 거니?' 하고 묻는다면 '결혼이란 무엇인가' 라고 대답하고, '얘가 미쳤나?' 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 라고 답하라고.

나는 이 책 뭐야? 이 사람 뭐야? 하며 깔깔거리며 읽었고, 한 동안 잊고 있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이 분의 책을 뚝딱 읽고나니 문득 그 소감을 '책이란 무엇인가?', '리뷰란 무엇인가?' 하는 제목으로 후기를 남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글맛을 살리는 능력은 없기 때문에 그저 교수님의 깊은 상식과 사유와 이해에 감탄하며 이렇게 부끄럽게나마 적고 있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모두 박학다식한 중년 남자가 뱉어내는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다정하고 가볍지 않으면서도 한 없이 유쾌하다. 교양이 높은 사람일 수록 김영민 교수님이 쓴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렇지 않은 나는 그저 김영민 교수님의 유쾌한 말투에 반해 아주 신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메모하고 싶은 구절이 정말 많았지만 이러다간 온 책이 다 밑줄 투성이가 될 것 같아서 그 욕구를 참기가 어려웠고 이 분의 유머에 한 명이라도 더 빠지길 바라는 마음에 칼럼 두 개를 붙여 소개해본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2018.09.21 /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정치사상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마 함께 밥 먹던 사람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한국이 어떤 정책을 집행하는지, 즉 정체성보다는 근황과 행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가 그 좋은 예다. 그의 부인은 일상의 사물을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인데, 얼마 전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오래된 연애편지를 활용해서 만든 것도 있었다. 특이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앞에서 작품의 소재가 된 옛 연애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과 표현이 내 감수성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느끼해서 그만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 혹여 내가 연애편지를 쓰게 되는 상황에 다시 처한다면, “영민”이란 이름을 한 글자로 줄여서 “민”이라고 자칭하지는 않으리라.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지 않으리라. “민은 이렇게 생각한답니다”와 같은 문장을 쓰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나의 희에게, 희로부터 애달픈 사랑을 듬뿍 받고 싶은 민으로부터”와 같은 표현은 결코 구사하지 않으리라.

 

심정지가 올 정도로 느끼한 문장으로 가득 찬 그 연애편지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 작품을 만든 친구 부인에게 이거 대체 누가 쓴 편지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연덕스럽게 “대학 시절 연애할 때 제 남편이 제게 보낸 편지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과학자의 탈을 쓴 그 친구에게 이와 같은 면모가 있었다니! 며칠 뒤,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급기야 “그거 네가 쓴 연애편지라며?”라고 묻고 말았다. 그랬더니 평소 감정의 큰 기복이 없던 그 친구가 정서적 동요를 보이면서, 자신도 전시회에서 그 편지를 보고 그 내용과 표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놀리고 싶어진 나는 왜 그런 느끼한 표현을 썼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갑자기 과학자다운 평정심을 잃고 고성을 질러댔다. “그 편지를 쓰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왜 그랬냐고 묻지 마!”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나를 할퀴었다. 그 더러운 손톱에 할퀴어지는 바람에, 내 손목은 진리를 위해 순교한 중세 성인처럼 피를 흘렸다.

그 친구의 이러한 난동은 정체성의 질문이란 위기 상황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하려 들었던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인격과 내력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오늘도 그는 그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자신과 현재의 ‘쿨한’ 자신을 화해시키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인문학적으로’ 씨름하고 있으리라.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할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살은 언제 뺄 것인지 등등. 그러나 21세기의 냉정한 과학자가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20세기 청년이 더 이상 아니듯이,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아니며, 친척도 과거의 친척이 아니며, 가족도 옛날의 가족이 아니며,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 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809211922005#c2b

 

[사유와 성찰]“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마 함께 밥 먹던 사람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걱정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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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돈이 많다면…

2022.10.13 /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내게 돈이 좀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과하게 비싼 소고기를 볼 때 그렇다. 비싼 자료를 발견했을 때 그렇다. 누군가 딱한 처지에 놓였을 때 그렇다. 연구비 확보가 난망할 때 그렇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했을 때 그렇다.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려 할 때 그렇다. 학생들과 답사를 하러 갈 때도 그렇다. 학생들과 답사를 떠날 때면, 어쩌면 이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답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좋은 곳에 묵으며, 좋은 것을 경험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좀 더 풍부한 재원이 있으면 좋으련만. 재원이 풍부하면, 학생들 자력으로 가기 어려운 곳까지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여행을 꿈꾸지 않는 한, 천문학적 액수의 답사비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간 여윳돈이 생긴다면, 꿈만 꾸던 이탈리아 답사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큰돈이 생긴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 경제가 한창 호황일 때, 배우이자 영화감독이었던 기타노 다케시는 돈을 너무 많이 번 나머지 이 돈을 다 쓰고나 죽을 수 있을까 겁이 덜컥 났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로또에 당첨되면 자칫 패가망신한다고 하지 않나. 돈 버는 일만큼이나 돈 쓰는 일도 쉽지 않은 법. 세상의 재력가들은 돈을 잘 쓸 역량이 있는 것일까. 난 돈을 잘 쓸 역량이 있는 것일까.

호젓한 곳으로 답사를 가면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밤은 제법 깊었으나 잠자리에 들기는 싫고, 누군가 대화의 정적을 틈타 맥락 없이 질문을 던지는 거다.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들어보았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질문들. 언젠가 학생들과 제주도 답사를 갔을 때, 한 학생이 그런 질문을 내게 던진 적이 있다.

“선생님, 수백억, 수천조, 하여튼 엄청난 돈이 생긴다면 뭘 하실래요?”

“그런 일 안 생겨요.”

“에이. 그냥 한번 생각해보세요. 선생님에게 개인이 쓰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돈이 생기면 뭘 하실래요?”

“사람들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 쓰겠어요.”

이 무슨 당치 않은 발언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겠다니. 그것도 돈으로 바꾸겠다니.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을 바꾸겠다는 꿈을 꾼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싶다는 말이다. 개혁가들의 과제는 결국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문제로 수렴되곤 한다. 그 엄청난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날 밤 내게 저 질문을 던진 학생은 춤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학부 시절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한때 극단에서 경력을 쌓아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언젠가 종강 파티에서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학생에게 청한 적이 있다. 춤 한번 보여줄 수 있느냐고.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부끄러워서일까, 춤 실력이 녹슨 것일까, 아니면 선생은 관객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이 싫다면 어쩔 도리 없다. 당연히 기대를 접어야 한다. 만약 어떤 이유에선가 기어이 그 학생의 춤을 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의 행동을 바꿀 방법은 강제, 계몽, 인센티브 중 하나다. 권력을 사용해서 특정 행동을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이 강제다. 의식화를 통해서 특정 행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게끔 하는 것이 계몽이다. 특정 행동을 부추기는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 인센티브다.

자, 그럼 춤추라고 그 학생을 강제해볼까. 그 학생에게 강제는 통하지 않는다. 좋은 말 할 때 나가서 춤추라고 위협한다고 해서 춤을 추겠는가. 웃기지 말라고 대꾸할 것이다. 설령 강제로 춤을 추게 한들, 그 춤이 볼만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제가 불가능하다면, 계몽을 시도해볼까.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설득해보는 거다. 댄스는 현대판 삼강오륜에 속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보는 거다. 그런 윤리적 계몽을 한다고 해서 춤을 추겠는가. 어설픈 계몽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그는 충분히 총명하다. 강제와 계몽이 불가능한 이상, 남은 방법은 인센티브뿐이다. 예컨대 춤을 추면 1억원을 주겠다고 해보는 거다. 그러면 추기 싫은 춤도 추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까짓거 한 5분 춤추고, 1억원의 고액 출연료를 챙기는 거지 뭐. 이처럼 고액의 인센티브는 특정 행동을 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 학생은 꽤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이 방법은 통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내가 돈이 없어서 시도를 못 할 뿐.

강제든, 계몽이든, 인센티브든 어떤 조처에 대한 방식으로는 저항, 탈퇴, 감내가 있다. 나가서 춤을 추라고요? 웃기지 마세요.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저항”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는 학교에 다닐 필요를 못 느끼겠군요. 자퇴합니다! 이것이 “탈퇴”다. 정치이론가 앨버트 허쉬만이 말했듯이, 저항이나 탈퇴는 큰 “비용”이 든다. 저항을 하면, 상대는 반격을 하려 들 것이기에. 탈퇴를 하면, 그간 투자한 시간과 노력과 돈을 잃게 될 것이기에. “손절”이 어디 쉬운가. 이런저런 고민 끝에 에잇, 까짓 춤 한번 춰주고 말지, 라고 결심하면 그것은 “감내”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강제에 의존해 왔다. 막대한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형무소, 크고 작은 벌칙, 횡행했던 고문과 구타는 모두 한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해 온 강제를 증명한다. 강제에 의존한다는 것은, 형벌과 같은 조치를 통해 사람들의 행태를 개선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강제는 얼마나 성공했을까. 여전히 같은 종류의 범죄가 빈발하는 것을 보면, 강제는 크게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강제를 꿈꾼다. 그런 ××들은 감옥에 처넣어야 해! 강제 프로젝트의 집행을 위한 비용은 비싸다. 계속 법을 만들어야 하고, 감옥을 지어야 하고, 잡아들여야 하며, 위협해야 하고, 위협이 공갈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계몽에 의존해 왔다. 너도나도 외쳐왔다. 정신 차려! 머리에 힘줘! 운동권의 의식화 프로젝트는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계몽 프로젝트 중 하나다. 계몽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식을 바꾸어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깨치지 못해서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피계몽자에 대한 계몽자의 도덕적 우위를 전제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계몽은 얼마나 성공했을까. 사람들은 계몽 당하기 싫어한다. 계몽 당한다는 것은 자기 의식의 열악함을 인정하는 일이니까. 그 와중에 계몽을 외쳤던 이들의 위선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인센티브에 의존해 왔다. 다양한 장려금, 보너스, 포상이 모두 인센티브다. 최근에도 인구감소를 억지하기 위해서 수백 조 원의 출산장려 예산을 써왔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인센티브의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잘못하거나 무지몽매해서 도달한 결과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가 출현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 특징들, 이를테면 저출산, 부동산 투기, 입시 과열, 수도권 집중이 걱정인가? 그것들 역시 사람들이 잘못하거나 무지몽매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나름) 합리적 행동이 낳은 현상이다.

저출산, 부동산 투기, 입시 과열, 수도권 집중을 범죄처럼 여기는 이들은 사람들을 강제해서 그 현상을 불식하려 들 것이다. 각종 형벌을 입법화하고, 어기는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저출산, 부동산 투기, 입시 과열, 수도권 집중을 몽매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사람들을 계몽해서 그 현상을 불식하려 들 것이다. 각종 도덕적 언설을 남발하며, 어기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낙인을 찍을 것이다. 아이를 안 낳겠다니, 그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일이라구!

저출산이든, 부동산 투기든, 입시 과열이든, 수도권 집중이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다수가 느꼈기에 거대한 사회 현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는 게 합리적이었기에, 그렇게 사는 한국인이 탄생했고, 그런 한국인이 다수가 되었을 때 그런 한국 사회가 출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과 다르게 사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때, 비로소 미래의 한국인이 출현하고, 그런 한국인이 다수가 될 때 한국의 새로운 미래가 출현하겠지. 그렇다면 개혁가는 강제나 계몽보다는 합리성의 조건을 바꾸는 데 더 부심해야 하지 않을까. 내게 돈이 많다면, 강제나 계몽보다는 합리성을 재정의하는 데 쓰겠다. 지금과 달리 행동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게끔 삶의 조건을 조정하는 데 쓰겠다. 그러나 내게 그럴 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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