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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1)(2)

by 이제이제이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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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1)

2002-01-03

 

나는 뽀다구나는게 싫다

왜 이창을 그만 쓰나.

이창 쓴 지 1년 됐는데 이젠 호흡이 긴 글을 쓰고 싶다. 칼럼은 호홉이 짧은데다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건 소설가랑 잘 안 맞는다. 소설은 애미함을 승인한다. 하지만 칼럼은 분명한 태도에서 감동이 온다. 그래서 칼럼은 문학적이지 않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나 오래 쓸 글은 아니었다.

진짜 신변잡기를 썼다.

18세기에 이덕무나 박제가 같은 한학자들이 신변잡기를 썼다. 이덕무의 <첨언소품>을 보면 책 읽다 향(香)자만 갉아먹은 책벌레를 잡아서 정말 그 벌레에게 향기가 나는지 봐야겠다는 얘기가 있다. 이들의 신변잡기 당대로서는 혁명이었다. 공맹, 군신관계, 사대부의 도덕을 논하던 시기에 그들의 신변잡기는 반역과도 같았다. 이덕무는 존재를 걸고 그런 하찮은 글을 썼던 거다. 그게 우리의 9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난 사소한 것의 정치학을 말하고 싶었다. 난 큰 이야기가 싫다. 왜 작은 것에서 우주를 본다고 하지 않나. 그러고 싶다.

주변에 대한 관심은 타고난 기질인가.

그렇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뽀다구’나는 게 싫다.

그런 기질 때문에 갈등을 빚은 적은 없나.

많다. 난 여성적이다. 남자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정치, 축구, 도박을 싫어한다.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 처음 봤다.

축구가 굉장히 남성적인 서사다. 11명의 남자들 두팀을 이뤄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 이기고 한쪽은 지고. 난 여자들 옷 사는데 따라다니길 좋아한다. 아내가 옷 사러 갈 때 몇 시간씩 돌아다녀도 즐겁다. 아내는 그런 내가 여자친구 같단다. 여자친구들은 내가 남자라는 걸 깜박할 때가 있다고들 한다. 난 남자가 많은 곳에 가면 불편하다. 여자들이 관계지향적인 데 반해 남자들은 지배를 원한다. 서열을 정하지 않으면 30분도 그냥 앉아 있지 못한다. 만난 지 30분 만에 선배라고 ‘영하야, 말 놔도 되지’, 이러는 거 너무 싫다.

한국 남성들은 그런 심성을 억압하도록 교육받지 않나. 성장기에는 상처 많이 받았겠다.

그랬다. 운동권 안에서도. 남성적으로 산다는 건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산다는 거다. 그건 너무 피곤하다. 90년대 이후 최소한의 사람들과 최소한의 관계만 맺고 산다. 정치활동도 안 하고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문단에서도 신경숙, 은희경, 배수아 같은 여성작가들과 더 친하다.

김영하는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발표하면서 신세대 작가군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다. 이 소설에서 그는 역사, 시대, 민족을 밀어내고 판타지를 두껍게 껴입은 현실을 빌려 죽음, 섹스,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했다. ‘이미지 중심의 서사’ 또한 주목받았다. 기존의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감수성의 출현이었다. 그뒤 최근작 <아랑은 왜>까지 그의 소설의 큰 줄기는 꺾이거나 변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그를 두고 “김영하는 영상 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현대적 일상성의 세계를 묘파한 소설들로 주목받는 젊은 작가이며, 이미지로 포착되는 일상 문화의 양상을 김영하만큼 감각적이고 매끄러운 서술기법으로 풀어내는 작가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산문집 <굴비낚시>도 펴냈다. 영화평과 에세이, 일기에 ‘애미하게’ 걸쳐 있는 그의 글을 그는 “자조적으로” 생선도 가공식품도 아닌 굴비에, 자신의 글쓰기를 굴비낚시에 비유했다. 개중에는 영화의 안으로 깊이 들어간 글도 있지만, 영화를 사유의 장으로 들어가는 문이나 삶을 뒤돌아보는 거울로 삼는 경우가 더 많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무중력에 상태에 비견될 만한 무억압 상태에서” 그는 자유롭게 상상한다. 신창원 검거 사건에서 <쇼생크 탈출>를 떠올리고, <부기 나이트>를 보고선 “텔레토비와 포르노는 한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생아”라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행보 때문에 제작자들은 시나리오를 맡길 소설가로 제일 먼저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는 <컷 런스 딥>의 이재한 감독과 함께 <개와 늑대의 시간>의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돼가나.

거의 끝나간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다. 한-미관계를 배면에 깐 정치적 액션영화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좁혀 말하면 탐정 누아르에 가깝겠다. 인간의 죄의식, 무기력, 사랑의 파멸적 속성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라 외롭고 고독한데, 이번 시나리오 작업은 공동창작이라 즐거웠다.

평론가들은 ‘이미지 중심의 서사’를 당신 소설의 핵으로 꼽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설이 영상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 소설은 오히려 문학적이다. 96년에 <나는 나를…>의 판권을 동아수출공사에 팔았다. 그런데 결국 시나리오가 안 나왔다. 막상 그 소설엔 영화화할 요소가 많지 않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하고 사건이 많지 않아서 시나리오로 옮기면 재미가 없다. 사실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 소설은 쉽게 영화로 상상이 된다. 게다가 시나리오까지 써서 한국의 폴 오스터를 꿈꾸는 건 아닌가 했다. (웃음)

어휴, 내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건 재미없다. 장편 쓰느라 일년을 고생했는데 시나리오 쓴다고 그 고생을 또 해야 하나. 내 소설은 의외로 고전적이다. 죽음, 질투, 분노 등 그리스극에나 나올 법한 고전적 주제를 다룬다. 히치콕도 그런 주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난 히치콕이 좋다.

영화가 싫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영화를 꽤 많이 본 것 같다.

당연히 봤으리라고 생각하는 영화들을 안 봤다. 예를 들면 <포레스트 검프>. 아직까지는 소설이 훨씬 좋고 매력적이고 재미있다. <스크린>에 글 쓰기 전에는 일년에 두편 봤다. 비디오도 보기 싫다. 대신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를 잘 본다. 그것도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것이어서 영화 앞부분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면서 말도 많다. 그냥 영화려니 하고 봐줘야 하는데 ‘저건 말도 안 돼’ 하고 따진다. 그래서 영화광인 아내는 내가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에 들 거라고 핀잔준다. 영화는 2차원이고 소설은 3차원이다. 소설은 우리가 화면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영화에는 우리가 개입할 차원이 없다. 감정이입할 여지도 별로 없다. 정우성처럼 잘생긴 배우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겠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영화적인 소설이 나올 수 있나.

내 소설 보고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건 순전히 텍스트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지 떠올리기를 좋아했다. 영화학도들이 애기하듯 영상이 영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영상으로 영상을 사고할 수는 없다. 복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잘해봐야 타란티노다. 거장들이 거장인 이유는 묵직한 주제와 그걸 밀어붙이는 힘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란>을 만들었던 것도 셰익스피어를 열심히 읽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평론을 글로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나. 그건 영화로 영화를 평할 수는 없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영화엔 비판 기능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하는 사람들,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부인이 영화광이니까 아무래도 부인 따라서 극장에 가거나 비디오를 보게 될 텐데.

아내도 결혼 뒤에는 영화보다는 책을 많이 본다. 영화 보는 취향도 다르다. 아내는 공포영화나 엽기적인 영화를 좋아하는데 난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 멕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 너무너무 행복하게 본다. 반면 신체훼손형 영화는 맘 편히 못 본다.

당신은 판타지 성격이 강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영화에서 호러는 판타지의 대표 장르인데, 모순 같다.

로맨스야말로 판타지다. 해피엔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 행복 아닌가. 내가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건 어렸을 때 겪은 분리불안 때문인 것 같다. 엄마가 무서워서 그랬는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그런데 로맨틱코미디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끝내 행복하게 결합하는 남녀를 보면 분리불안이 해소된다.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남자들, 영화 보면서 심리치료를 하는 거다. 그런 남자를 유치하다고 공격하면 안 된다. 나 같은 사람은 김기덕 영화 보면 안 된다.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2)

2002-01-03

 

뜻밖에도 그는, 영화와의 친연성을 부인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시나리오를 쓴 것도 이재한 감독이 6개월 동안 끈질기게 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그는 “모든 인간은 그가 읽은 책의 총체” 라고 믿을 만큼 책을 좋아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동서, 고금, 장르를 망라한 수십개의 저서들을 입에 올렸다. <난중일기>에서 <발레이야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하까지. 그는 영락없는 인문주의자, 고전주의자였다. 미술도 현대미술보다 르네상스나 중세 화가들의 회화를 좋아했다. 예컨대 <나는 나를…>은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에서 시작해 들라크루아의 <사루나디팔의 죽음>으로 끝난다. 반면 그는 만화나 무협지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무협학생운동>을 썼다. 역설의 연속. 우리가 특정인에 대해 피상적으로 갖는 이미지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확인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아무튼 간에. 그가 <무협학생운동>을 쓴 경위는 이러하다. 1992년 그는 하이텔에 원고지 4매 분량의 무협지 같은 글을 올렸는데, 어느 출판사 사장이 무협지로 학생운동사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때 그는 어른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무협지를 읽었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소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뒤 그는 한 시사월간지 기자(현 <씨네21> 편집장)의 청탁으로 당시 정치현실을 빗댄 무협지 <대권무림>을 썼다. 그러다 그는 ‘대형사고’를 쳤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에, 겁도 없이 “청와대에서 조깅하던 김영삼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살해됐다”로 시작되는 정치소설을 쓴 것이다. 이 소설은 무려 11개 일간지에 박스 기사로 실렸고, 일개 대학원생이던 그는 현직 국무총리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사건이 수습될 즈음 그는 방위로 군대에 갔는데, 아무도 이 김영하가 그 김영하인 줄 몰랐던 게, 돌이켜 생각하면 커다란 행운이었다.

<무협학생운동>을 썼을 때 반응은.

친구들이 그 책 보고 불쾌해했다. 난 그런 엄숙함이 싫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엄숙한 가짜들이 정말 많다. 현대소설의 중요 정신이 바로 웃음의 철학이다. 웃음 싫어하는 사람은 문학의 적이다. 전체주의는 유머를 추방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난 즐겁게 살려고 한다. 영화계에 장진처럼 ‘재미있게 찍었으니 재미있게 봐라’, 이러는 감독 많지 않다. 웃고 즐길 영화를 만들고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래, 나 똘아이다’ 라고 말하면 안 되나. <씨네21>도 지나치게 진지하다. 이러다 한국영화 망하지 않을까 걱정은 많이 하면서 영화 보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들을 보면 상상력이 없는 인간을 못 참는 것 같다.

상상력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 상상력을 억압하는 인간을 못 참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력을 기발한 재주 정도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상상력은 정치의 문제다. 상상력이 작동하려면 자기검열이 작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면화된 기준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상상력은 커가지 않는다. 결국 상상력은 기존 체제를 승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느긋하게, 고양이처럼

<흡혈귀>는 그의 소설 가운데에서도 상상력의 농도가 짙은 축에 드는 작품이다. 작중 화자 ‘나’는 “아무래도 내 남편은 흡혈귀같다”라고 쓴 한 여성의 편지를 공개한다. 시나리오를 쓰는 남편을 흡혈귀로 의심하던 그녀는 “세상의 모든 흡혈귀는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라는 메모를 보고 이를 확신한다. 그러면서 “남편과 그의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을 상실하고 빛에 적응해왔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흡혈귀의 소외감은 그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는지 모른다. 그는 ‘뿌리뽑힌 자’, 아니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자’ 같다. 들뢰즈의 언어대로 말하면 그는 ‘유목민’이며,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탈주의 선’을 찾는 자다.

그는 ‘별볼일 없는 것’을 좋아한다. 명종조의 인물 아랑을 등장시켜 <아랑은 왜>를 쓴 것도, “그 시대, 그 인물이 별볼일 없어서”다. 그 별볼일 없는 것과 더불면서, 그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는 스스로를 “에피큐리안”(쾌락주의자)이라고 했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했으며, 실제로 끊임없이 그 방법들을 찾고, 만들고 있다. 흔히 경쾌함이 가벼움, 천박함으로 오해되는 시대를 살면서, 연애마저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이라며 금기시되던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는 생기(生氣)를 잃지 않았다. 그런 탓에 80년대에는 리버럴하다는 이유로 운동권 안에서 비난받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인간의 원초적 즐거움이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즐거움’, ‘즐거움의 아름다움’을 너무 오랫동안 억압당하고 살아왔다. 그는 그런 분위기를 승인하지 않으려고 ‘고집부린다’. 그 고집은 근엄한 인간들에겐 “나는 꼴통”이라는 선언으로 들리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칭 타칭 아웃사이더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니다. 난 문화적 기득권자이다. 이미 많은 걸 가졌고 억울할 때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창을 쓸 때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고 일침을 가하고 싶은 욕구를 많이 느꼈다. 하지만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싶어 자제했다. 인사이더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비판과 자성의 능력이다. 소설 쓰던 초기엔 내가 아웃사이더가 아닐까 하는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내 소설이 한국소설 전통에서는 계보를 찾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건방진 생각이었다. 내 소설도 이미 한국문학의 풍경 안에 들어와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작가가 아웃사이더로 자리매김되면, 작가가 화제가 되고 작품은 사라진다. 마광수·이문열·장정일·샐먼 루시디가 그런 케이스다. 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논쟁 안 하고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산다. 나는 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 느긋하게, 고양이처럼 살고 싶다.

인사이더라고 하더라도 아웃사이더의 감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예컨대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그건 소설가에겐 기본이다. 언제나 의심한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서도 그 이면에 무엇이 있나를 생각하고. 난 심심한 걸 못 참는다. 주의가 산만하고 게으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산다. 어느 친구가 그러더라, ‘넌 평범하게 사는 것 같은데 독특해’라고.

독특하다니, 어떻게.

나 생긴 대로 산다. 돈이 되더라도 재미없고 바빠질 것 같은 일은 안 한다. 아내가 심리학과를 나왔는데 나보고 그러더라, 콤플렉스가 별로 없는 인간이라고. 나처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드물단다.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같은 결핍이 있어야 뭐든 열심히 하는 법인데, 난 꼬인 데가 없다는 거다.

“소설 쓰면서 좋은 사람이 돼가는 것 같다”

‘참 복받은 사람이군.’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일순 그가 부러웠다. 콤플렉스가 없는 인간, 상처가 없는 작가라니. 작품 안에 작가 내면의 공포, 광기, 불안, 살의와 투쟁을 벌인 흔적이 낭자하게 남아 있어 독자마저 섬뜩하게 하는 문학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소설에 ‘김영하’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됐다.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굳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 순전한 상상력으로 극중인물과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적인 체험을 소설로 쓰는 작가들은 상상력이 부족한 자들이며, 그들에겐 작가로서의 자질이 없다”라고 말했다. 김영하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까발려 연민을 구걸하는 작가들을 혐오하고, 지면을 빌려 “징징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많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는 자기표현이자 자기치유의 과정이다. 그런 작가들에게는 글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소설을 쓰지 않고도 별 문제없이 살 사람 같다.

내게 글쓰기는 운명의 구원은 아니지만 글쓰기는 나를 살아가게 한다. 소설 쓰면서 좋은 사람이 돼가는 것 같다. 또 글쓰기는 나를 타인과 소통시켜준다. 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건 나의 소통의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일 거다. 물론 좋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김진명 소설의 팬들이 내 소설을 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작품과 작가는 별개라고 말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소설 속에서 작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당신과 가장 가장 가까운 인물은 누구인가.

<나는 나를…>이 나와 가장 가깝다. 나도 소설 속의 K처럼 사팔뜨기였다. 소설 속에 “사팔뜨기는 세상이 두 개로 보인다. 그리고 그 중 한 개를 선택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내가 그랬다. 하지만 한 인물에 전적으로 투사된 건 아니고 여러 인물에 내가 녹아 있다. K가 차를 몰면서 속도에 열광하는 것도 나랑 같다. 한때 난 스피드에 매혹됐었다. 타나토스에 경도된 때였다. 고속도로에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어떤 우울, 공격성이 나를 지배했는데, 그것이 세상으로 향하지 못하고 나를 향했다. 자살은 나를 향한 공격 아닌가. 90년대 초반 좌파들이 좌표를 못 잡고 헤맬 때였다. 지금은 그런 공격적 허무는 없다. 하지만 허무의 기본 정조는 안 바뀌는 것 같다.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되질 않는다. 그게 나와 진보주의자들이 잘 안 맞는 부분이다.

그는 일년 전 담배를 끊었다. 건강 때문이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루의 모든 일과가 담배와 연관되어 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 때문이었다. 어딜 가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인가 아닌가, 누굴 만나도 담배를 피우는가 아닌가 따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담배와 무관하게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누구에게 이건 싱거운 이유일지 모르나, 그에게는 절박하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이 ‘그만의 이유’라는 점이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모든 인간에겐 그만이 완성해야 할 자아의 신화가 있다”고 했다. 김영하는 ‘자기대로’ 살면서 그만의 신화를 찾아가고 있다. 경쾌하고 즐겁게, 가끔은 함께 놀자고 손짓도 하면서. 잠시 쉬게 해준 다음, 또 꼬셔서 쓰게 해야지, 라는 지겨운 직업병의 아우성을 들으며 그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글 이유란 fbird@hani.co.kr·사진 이혜정 hjlee@hani.co.kr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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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낚시>에 대한 한겨례 평.

소설가 김영하(32)씨가 (굴비낚시)라는 영화 산문집을 펴냈다. 18편의 영화에 대해 쓴 글들이 묶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를 매개로 한 '영하 이야기'라고나 해야 할 글들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알고리즘은 무수한 오류를 생성하고 다른 프로그램의 수행에까지 부담을 주고 모든 메모리 용량을 혼자서 까먹으며 컴퓨터 전체의 속도를 떨어뜨리며 하드디스크에 쓸데없는 파일들을 무수히 만들어놓는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에 대해 쓴 이 글은 영화와 직접 관련이 없는 듯 보이면서 사실은 이 영화를 '김영하 식으로' 해석해 놓고 있다. -마음산책/7500원.

https://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251415.html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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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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