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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 좋았고 좋았던 책.

by 이제이제이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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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책을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며 읽을 수 있을까?

나에겐 알쓸인잡 출연자로 더 익숙한 심채경 박사님.

방송에서도 참 좋은 느낌이었는데 이 분의 책을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지난 봄 전주 한옥마을 도서관에서 또! 우연히 이 분의 책을 접했다.

귀엽기로는 내 지도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하셨다. 이공계 대학원에서 흔히 ‘랩 미팅’이라고 부르는 이 회의는 그야말로 대학원 생활의 꽃이다. ‘꽃 같다’는 말이 중의적으로 쓰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하지 않겠다. 회의 준비로 이틀 전부터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하루 전날은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수식의 오타나 그래프와 씨름을 하다가, 살벌한 회의 끝에는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허덕이다보면 다시 다음 회의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흔한 대학원 생활이다.

 

한옥 도서관 마룻바닥에 잠시 앉아 책을 열 페이지쯤 읽었을까. 자신이 겪어온 대학원생의 생활을 너무나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박사님표 이과식 유머(?)에 푹 빠져들어 다음에 꼭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드디어 우리 회사에 새로 오픈한 도서관에서 심채경 박사님의 책을 다시 만났다.


 

이과생, 대학생, 자연대생, 과정생, 연구원(나도 연구원이라 할 수 있다면..), 워킹맘, 여성과학자(나는 아니지만).. 학교를 다닐 때 부터 현재까지 나는 나를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항상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적당한 해학과 슬픈 유머로 공감을 줄 수 있는 글이 있었다니.

부끄럽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슬펐다. 점심식사 후 짧은 휴식 시간동안 딱 10장만 읽어야지! 하고 도서관 구석에서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부터 나는 눈물을 참는게 정말 힘들었다.

서평..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내 짧은 리뷰로 어느 누군가가 '에이 그 정도로 재밌는 책은 아닌데?' 혹은 '아 이 이야기들은 리뷰가 아닌 책에서 처음 접했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할까봐 여기서 많은 말을 더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나는 눈물을 참아가며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철 든 고등학생 때 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마다 내 앞에 명함처럼 놓여 있었던 무거운 짐을 박사님이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일까? 아니면 그 동안 내 몸과 마음 편하자고 알량한 순발력으로 넘긴 과거의 여러 순간들이 부끄러워서 일까?

나는 어찌보면 연기를 참 잘 하는 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는 얌전한 연기를 잘 했고, 고등학생 때는 방송부도 아니면서 이상한 3분짜리 방송을 전교생에게 보이는 프로를 해야한다 하니 차마 싫다는 말도 못하고 그 밋밋하고 어색한 얼굴로 꾸역꾸역 방송실에 출석해 연기를 했고, 대학생 땐 낮엔 도서관, 저녁엔 파닭집에 앉아있는 연기를 잘 했고, 기말시험 답안을 작성할 땐 머릿속은 비어있으면서도 부분점수에 목숨을 걸고 잡지식을 총망라해서 답안을 써내곤 했다.

사회 초년생 때는 일잘하는 연기를 했고, 부당한 일에도 참는 연기를 잘 했고(그게 부당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뭐랄까. 워킹맘의 연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연기인생을 살아온 내가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심채경 박사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평범하게 대학을 다녔고요,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이유로 이 전공을 선택했구요, 나는 어쩌다보니 이 자리에 와 있어요. 당신처럼 이유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좋아요. 나도 어쩌다보니 이 자리에 있어요.

여자로서, 연구원으로서, 워킹맘으로서, 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소중한 책을 놓치고 이 시기를 보냈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 같은데 늦게라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박사님 글 왜 이렇게 잘 쓰시는건지!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간결하고 힘있고 또 다정해서 읽는 내내 정말 좋았다.

앞으로도 응원합니다!

책은 정말 좋았고 좋았습니다.

10

적당히 성실하게 굴면 어른들은 쉽게 안심했고, 신임과 방임 사이의 어드메에서 나는 동네 뒷산을 쏘다니고 PC통신 속 세계도 실컷 돌아다녔다.

28

아직 박사 수료생이던 시절, 박사가 아니어도 대학 강의를 할 수는 있었지만 행정 담당자가 시간강사인 나를 습관적으로 ‘박사님’이라고 부를 때 ‘아니, 사실은 박사 수료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하나?’ 하는 잡생각을 했다. (...) 그만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덜 아까울 때일까 늘 궁금해하며, 남은 경제력과 남은 정신력을 자꾸만 저울에 달아보는 시기.

29

떠날 날은 멀었고 그럴 자격도 갖추지 못했건만, 연구실을 떠나는 연습을 한다. 버리고 또 버리면서 마음을 같이 비운다. 나는 안다. 내가 이곳을 얼마나 사랑해왔는지. 여기서 내가 얼마나 큰 위안과 기쁨을 얻어왔는지. 이곳이 내게 얼마나 큰 휴식이었는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병을 얻고 치료하고 또 얻고 버텼다.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40

Q1. 유니버스, 코스모스, 스페이스. 모두 우리말로 '우주'라고 번역된다. 무엇이 서로 다른가?

(강의 첫 시간에 내시는 퀴즈. 너무 멋지다!!)

..

+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사회생활하는 이야기도, 우주인 이소연님의 이야기도 정말 감명깊었지만 더 이상 기록은 멈추기로. 나는 그냥 여러번 다시 읽기로 했다.

++

본문 중에서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몰래 뒷길을 걸어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보고 아무래도 우리 학교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 검색해봤더니 어머나 학교 이름이 바로 나왔다.

사실여부 확인은 어렵지만 이 정도면 99% 맞을듯.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특이한 지구과학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래서 내가 지구과학을 좋아했었나.

심박사님이 학교를 다니실 때와는 다른 선생님이겠지만 그래도 뜻깊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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