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씨네21 [이창] 김영하 칼럼 (2001)

by 이제이제이 2024. 2. 27.
반응형

김영하의 이창

문제적 아버지가 죽었다

 

2001-01

눈이 펄펄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당 서정주가 세상을 떴다. 영화 잡지에 시인 이야기를 하게 돼서 안됐지만, 그래도 미당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연재의 첫 번째를 미당 얘기로 막는다.

문단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시인 아무개와 미당의 문제를 두고 다투고야 말았는데, 다툼의 전말은 이러했다. 80년대에 미당이 저지른 행적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시에서 더이상의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다는 나, 미당의 시에서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하는 너같은 작자는 문학을 할 자격이 없다는 그. 우리의 다툼은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미학적 가치판단의 문제는, 한쪽이 변하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80년대식 용어로 말하자면, 세계관의 문제다. 영악한 우리는 더이상은 그 문제로 다투지 않았다.

그 뒤로 세월이 흘렀다. 다른 시인이 내게 미당 시 전집을 선물해주었다. 어느 어둑한 밤, 나는 가만히 앉아 시편들을 읽었다. 오, 빌어먹을. 욕이 나왔다. 그리고 곧 입을 다물었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시구의 광채 앞에서 할말을 잃었다. "아름다운 배암 / 얼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또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라든지, "피가 잘 돌아... 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혹은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싶습니까?" 같은 구절 앞에서, 내 자신이 이다 도시나 로버트 할리 같은, 그저 한국말 좀 할 줄 아는 외국인처럼 느껴질 때, 나는 고만 글쓰는 일을 콱 때려치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나와 다툼을 벌일 뻔했던, 그 선배 시인의 심사를 조금은 가늠하게 되었다. 미당의 시 앞에서 우리는 그저 비재에 몸부림치는 아둔한 습작생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증오스럽다. 그 증오에는 질투의 피냄새가 섞여 있다. 피블로 피카소의 부고를 받은 뉴욕의 한 화가가, "오늘 내 아버지가 죽었다"고 외친 그 심정을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미당이 20세기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한 시간 앞두고 세상을 떴다. 젊어서는 친일파였으며 늙어서는 전두환에게 축시를 바친, 정치적으로는 옳지 못했으나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남긴, 문제적 인물 미당은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직면해 있다. 에술가에 대한 정치적 치죄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던 시인, 작가, 화가, 무용가, 가수에 대해, 또 그들의 창작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친일하거나 전두환에게 협력할 기회도 없었던 이들에게도 돌을 던질 자격은 있는 것일까. 내가 그였다면 과연 친일과 독재협력의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이 영속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파 지식인은 팍스아메리카나의 그늘 아래 미국적 가치의 한국화에 힘쓰는 친미 지식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월남전이 자유를 위한 성전이니 어서 젊은이들을 보내야 한다고 외쳐댔던, 그러나 사실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호응했던 나팔수들과 서정주는 어떻게 다른가. 가난과 장애 속에서 친일이 죄인지도 모른 채, 관공서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인데도 친일파가 되어버린 운보 김기창과 같은 사람의 예술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죄가 되는 일일까. 민족이라는 가치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항상 우선하는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했던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은, 그가 자신의 고향과 민족을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평가절하되어야 하는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배치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가, 따위.

미당은 민족반역자이며 독재협력자라고, 그러니 그에 대한 어떤 추모도 역겹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쉬운 일이다. 미당의 시를 읽은 적이 없다면 더더욱 쉽다. 게다가 신나는 일이다. 아주 적은 에너지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의 모든 정치적 실수와 인간적 결함을 알면서도 그를 껴안고 가는 자들, 나는 그런 이들 몇몇을 알고 있는데, 그런 결정은 쉽지 않다. 죄많은 이의 시신에 발길질을 하는 자는 많아도 그를 거두어 장사를 치르는 이는 드물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냐, 고 내게 묻는다면 나로서는 할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미당을 읽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불길한 일이라는 것. 그를 어떻게 매장할 것인가에 사실은 우리의 20세기가, 누더기 근대문학이, 오욕으로 점철된 현대사가 매달려 있다. 이런 얘기를, 영화잡지의 지면을 빌려 하고 있으니 송구스럽다. 독자들도, 그리고 망자께서도, 빈소에 못 찾아간 어느 심약한 자식의 부조금이려니 여겨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다.

내가 <아줌마>를 싫어하는 두세 가지 이유

 

2001-04-07

화제의 드라마 <아줌마>가 끝났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너무 속보이고 그저 <아줌마>가 끝났다, 라고만 적는다. 나는 드라마 <아줌마>가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먹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나는 먹물이다. 그리고 나는 먹물인 내가 좋다. 나는 지식인으로 교육받았으며 지식인으로서 생각하고 지식인으로서 산다. 또한 나는 지식인으로서 드라마를 본다.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월화드라마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그때에도 나는 역시 먹물이다.

왜 <아줌마>가 싫다는 거지? 너 장진구지? 그렇다. 나는 장진구다. 손에 흙이나 기름을 묻혀본 일 없으며 오로지 이 주둥이로만 먹고 사는 존재다. 입만 열면 이 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지만 투표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 시간은 떠들 수 있다. 영화 <트래픽>을 보고 나오면서, 환각은 자유 아니냐, 도대체 국가가 개인의 환상에 대해 개입할 권리가 있느냐며 열변을 토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는 마약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게 먹물이다.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 그들이 먹물이다. 군대에 갔다오지 않고도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떠들고 국가가 과연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 옳으냐를 가지고 논쟁할 수 있는 자다. 먹물들은 태생적으로 경험주의를 싫어한다. 한마디로 먹물들은 꼴보기 싫은 자들이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노동은 하지 않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소설이니 철학이니 하는 책들을 들여다보며 젊은 날을 허송하고는 국가와 사회를 향해 왜 우리 같은 고급두뇌들을 썩히느냐며 항의한다. 가족과 아내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다. 아직 우리나라는 여건이 성숙하지 않아서, 혹은 인문학의 깊이가 천박해서 그렇다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줌마>는 그런 먹물들에 대한 태클이었다. 오삼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상식들은 장진구의 장광설을 한마디로 일축한다. 이름하여 ‘놀고 있네’ 주먹이다.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요설도 한방에 작살난다.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모두 비켜라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오삼숙이 싫고 오삼숙의 그 ‘놀고 있네’가 싫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먹물들은 정말로 ‘놀고 있’기 때문이다. 먹물은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이다. 문학도 철학도 영화도 미술도 모두 삶의 잉여다. 그러므로 작가도 영화감독도 철학자도 모두 한때는 장진구였다. 한권의 소설이,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이들은 갖은 요설을 동원하여 주변의 오삼숙들에게 곧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숭고함을 각인시켜야 한다.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만한 장진구가 또 어디 있는가. 공자도, 유비도, 그리고 예수도 알고 보면 한때 모두 장진구였다. 예나 지금이나 오삼숙으로 대표되는 상식들은 이런 먹물들을 싫어한다. 좋다. 얼마든지 미워하라. 어차피 우리 먹물들은 사회에 기생하도록 진화해왔으니 이런 상황이 별로 새롭지 않다.

그렇지만 (먹물답게) 한마디는 하고 가자. <아줌마>는 분명 문제 있다. 우리를 씹고 싶거든 좀더 정교하고 세련되시라. 세상에 장진구 같은 먹물은 없다. 있다면 머릿속에나 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교활한’ 먹물들이 드라마를 보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장진구를 이렇게 부른다. 저런 바보 같은 놈! 뿐만 아니라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도 없다. 죄짓지 아니하며 언행이 일치하며 언제나 서로를 위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는 그들. 설마. 이것이 1930년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선동극이 아닌 바에야 이런 고결한 인물들이 어찌 한 뭉텅이로 모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고종석은 드라마 <아줌마>가 입센의 <인형의 집>에 필적할 작품이며,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새로운 기원이랄 만하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고종석은 보수적 논객들이 가정과 결혼의 파탄을 부추기는 선동물로 <아줌마>를 비난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은 우리 먹물들의 오버일 뿐이다. 이혼을 통해 과거의 구질구질한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드라마가 (우매한) 대중을 선동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먹물들 특유의 착각이다. 대중은 최소한 먹물들보다는 영악하다. 어쩌면 <아줌마>에 오래도록 찬사를 퍼붓는 자들은 오히려 먹물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아줌마>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너무나 건전하고 너무도 올바르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김영하/ 소설가 youngha@writeme.com

선택의 기술

뻔한 말이지만, 세상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서점에는 처세술 책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는 살지 마라, 저렇게도 살지 마라, 등등의 충고들로 행간은 빽빽하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처럼 노골적으로 돈 많이 벌자고 부추기는 책들도 있지만 역으로 돈 많이 벌어봐야 헛거고 열심히 살아봐야 자본가들 배만 불리니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아니하고 느리게, 그리고 다르게 살자고 속삭이는 책들도 있다. 후자도 넓게 보자면 처세술 책이다. 결국 ‘사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세술이라는 장르는 자본주의 세상과는 찰떡궁합이다. 봉건시대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처세가 필요치 않다.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농사를, 장인의 자식으로 나면 장인으로, 뭐 그런 식이다. 마을의 대장장이는 처세술보다는 철과 불의 성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귀족이나 정치계급은 처세나 사교, 혹은 넓은 의미의 정치에 관심이 있었겠으나 그런 사람들이 어디 그걸 책 사보고 배우겠는가.

그렇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선 다르다. 정말이지 자본주의 세상에선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다. 돌잔치 상에서부터 우리는 선택을 강요당하며 그 의무는 대체로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선택 하나하나가 일생에 작게 혹은 크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는 피곤하다. 도대체 어떤 놈을 사귀고 어떤 놈은 잘라야 되는지, 주식은 사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돈을 모아야 되는 건지, 땅을 끼고 있어야 되는 건지, 저 자식이 나한테 개기는데 저걸 밟아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꾹 참고 살면서 성불을 노려봐야 되는 건지, 여하튼 우리 삶은 선택의 지뢰밭이며 그 하나하나가 결코 간단치 않다. 이래서 처세술 책은 잘 팔린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처세술이란 선택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처세술 책을 다 읽어도 선택은 난망이다. 책 밖 세상,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책 속에선 그토록 분명했던 것들이 책을 덮자마자 흐물거리며 불투명한 점액질로 변해 버린다. 책을 읽고 있을 때만 해도 새로운 세계에서 멋지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처세술 책이 기본적으로 단순화, 그리고 유형화라는 논리적 기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세술의 저자들이 제일 먼저 착수하는 일은 세상을 몇 개의 블록으로 구획하는 작업이다.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 친구와 적, 자산과 부채 등등의 대립항들이 동원된다. 물론 인간 유형도 대략 서너개의 부류로 친절하게 구분해 준다.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도 아무개형, 아무개형, 아무개형 따위로 나누어 준다. 일단 그렇게 분류해 놓은 뒤에 저자들은 각각의 유형마다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대체로 처세술 책에는 ‘그래 이게 바로 나야’라는 인물 유형이 하나쯤은 반드시 있으며 ‘그래 김 부장이 바로 이런 놈이야’라고 무릎을 치게 되는 인물 유형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니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이 바둑판처럼 일목요연해 보인다. 이쯤에서 독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정도라면 나로서도 해볼 마하지 않을까?” 이 순간 처세술 책은 피로회복제처럼 일시적이고 휘발성 강한 각성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건 진정한 의미의 ‘처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잘 알고 있듯)세상도 처세술 책들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조감도가 아니다.

어쨌든, 피로회복제처럼 소비되는 것. 그게 처세술 책이 계속해서 팔려나가게 되는 원리다. 피로회복제가 피로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듯 처세술 책 역시 궁극적으로 처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팔린다. 성공의 꿈, 생존의 희망, 탈락의 불안을 먹고사는 불가사리. 그게 작음의, 아니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처세술 교본들이다. 그럼 어디에서 인생의 참된 지혜와 올바른 선택의 기술과 깊이있는 인간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디라고, 자신있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자가 사기꾼일 것이다. 대신 여전히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릎걸음으로 더듬거리며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정답일 것이며 그게 바로 우리가 멋진 영화와 좋은 책을 찾아 어두운 극장과 서점에서 금쪽 같은 시간을 탕진(?)하는 이유일 터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