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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2020) / 김영하의 2009년도 시칠리아 여행기

by 이제이제이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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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 없었어요?" PD가 물었다.

"시칠리아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 같았다.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나는 한 번도 시칠리아에 가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거긴 어쩐지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 그린란드나 남극같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시칠라아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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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에 나는 모든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국립예술대학의 교수였고 네 권의 장편 소설과 세 권의 단편소설집을 낸 소설가였고 라디오 문화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서울에 내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가 있었고 권위있는 문학상들을 받았고 서점의 좋은 자리엔 내 책들이 어깨를 맞댄 채 사이좋게 놓여 있었다. 소설들은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팔려나가는 편이었고 개 중에 어떤 것은 영화나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또 몇 권의 소설은 해외에서도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한 일간 신문으로부터 연재 소설 제의도 받았다. 좋아요, 합시다. 하죠, 뭐.

한마디로 부족한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내 삶은 실로 숨막히는 것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장편 연재는 무리 아니야? 아내가 물었지만 나는 걱정 말라고, 다 해낼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돼. 나는 잘나가는 벤처기업 의 CEO처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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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예술가가 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어린 예술가를 데리고 예술 학교에 들어 온 것이다. 물론 이곳은 좋은 학교이고 훌륭한 선배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다. (...) 학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평가와 비난이 아니라 격려와 사랑을 함께 나눌 예술적 동지를 구하라.

 

그런데 그 후 가장 먼저 학교를 떠나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들은 학생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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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몇 주 동안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달려드는 물건, 물건들에게 질려버렸다. 저를 정말 버릴 건가요? 물건들이 화를 내며 나자빠졌다. 엄청난 물건들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움직였다. 나중에는 뭐가 남아 있고 뭐가 떠나갔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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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이 모든 것, 그러니까 물건, 약정, 계약, 자동이체, 그리고 이런저런 의무사항들을 털어내면서 나는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읽지 않는 책들, 보지 않는 DVD들, 듣지 않은 CD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 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 도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 사들인, '너무 오래 존재하는 것들'과 결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서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게 왔다가 그대로 가도록 하는 삶. (...) 스트리밍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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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는 방송 프로듀서나 카메라맨도 나와 같은 일종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들은 예술가라기 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밤늦도록 일하고도 새벽이면 벌떡 일어나 카메라와 삼각대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

이상하게도 그림이 잘 나오는 곳은 하나같이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 춥다고 오두방정을 떨어서는 곤란하므로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무너진 신전의 기둥 사이에서 걸어나와 천천히 카메라의 앵글 밖으로 걸어나가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촬영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중간중간에 PD는 마이크를 들이대고 "보시니까 어떠세요?" 같은 질문을 던져왔고, 그때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내가 시칠리아에 대해 알고 있는 빈약한 지식을 떠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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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는 관광객은 크게 보아 두 종류인데, 등산화를 신은 이들과 샌들을 신은 이들이다. 등산화를 신은 이들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화산재를 딛고 활화산의 실제를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부류이고 샌들을 신은 이들은 서핑이나 스노쿨링,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오는 부류다. 등산화를 신은 부류는 배낭을 메고 진지한 얼굴로 피켈을 들고 다니며, 샌들을 신고 다니는 이들은 대체로 붉은 얼굴에 화려한 문신, 약간 껄렁한 표정을 하고 다닌다. 나는 얼굴이나 표정은 등산화 부류에 가까운데 신고 다니는 것은 샌들이라 섬사람들에게 약간의 혼란을 주는 부류다. 섬사람들은 나와 아내를 자포네세, 즉 일본인이라 부르는데, 처음에는 듣는 대로 교정을 해주었지만, 듣고 돌아서면 또 자포네세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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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눈길과 표정. 미소 뒤에 감춘 한 가족의 기대어린 갈망. 전에도 그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바로 쿠바의 아바나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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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속담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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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종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Memory Lost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2009년에 나왔던 책이 2020년에 복복서가에서 제목을 달리하여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출판사는 전에 말했던 그 복복서가이다.

김영하 작가의 글 답게 깔끔한 문체와 위트있는 비유가 정말 좋았던 책이었지만 40살의 김영하가 가진 것을 나열한 부분을 읽을 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김영하 작가를 정말 좋아하고 그의 글과 말 또한 좋아하지만 가끔은 그가 지닌 무한한(것 같은) 영향력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번 달 북클럽 선정도서. 안타깝게도 이 책은 전자책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한번 요청해보세요, 라는 그의 댓글이 특이해서 눈길이 갔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전자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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