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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보다』 & 복복서가

by 이제이제이 2021.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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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 글로 표현한 것들을 모아놓은 책. 초판은 2014년도지만 21년 2월 말에 『보다』, 『읽다』, 『말하다』 세 권을 모은 『다다다』 가 출간됐다. 한 마디로 오래 됐지만 동시에 가장 최근에 찍혀져 나온 김영하의 글인 셈.

 

 

글 잘 쓰는 작가의 책은 술술 읽히면서도 남는 문장이 많다. 이 책에서는 <건축학개론>, <신세계> 등 김영하식 영화 해석이 특히 좋았고, 복잡한 상황을 간단한 사물에 빗대어 잘 표현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글이 기발하고 참 재밌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며 읽었다. 마치 나만 알고 있는 글 잘 쓰는 한 남자의 블로그를 우연히 알게 돼서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읽은 듯한 기분. 가볍고도 즐거운 독서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

그리고 복복서가 이야기.

원래 김영하 작가의 책은 모두 문학동네에서 낸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나 『다다다』 같은 김영하의 신간들이 복복서가라는 새로운 출판사에서 나온 것을 보고 어떤 출판사인지 궁금해졌다. 신간 뿐 아니라 『검은 꽃』, 『살인자의 기억법』 도 리커버 출간했고 놀랍게도 김영하 북클럽 첫 번째 책 <완벽한 아이>도 복복서가 출판.

찾아보니 예상했던대로 복복서가 출판사 대표는 김영하 작가의 아내분이었고 책 선정, 기획 등은 김영하 작가와 대표가 하지만 디자인 같은 부분은 문학동네와 함께 한다고 한다(아닐 수도 있음).

그렇지않아도 김영하 작가는 문학동네에서 인세 1~3위를 다투는 작가라고 알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말하니 "문학동네에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인세 제일 많이 받는 작가 아니야?ㅋㅋ" 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제 작가님은 TV에도 나오고 라디오에도 나오고 강연도 하고 인세도 다 가져가고 굿즈도 직접 만들어 팔고 책표지 디자인도 하고 책값도 다 벌어들이는 엄청난 작가가 되었다. 작가계의 토니스타크가 되는 것인가? 작가님는 이 책에서 '싼 것은 더 싸지고 비싼 것은 더 비싸지는 시대'라고 했는데 요즘 시대는 부자만 더 부자가 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10

마르셀 에메의 단편소설 「생존 시간 카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문학동네, 2002)

시간이 거래되는 가상의 세계

11

이년 반의 뉴욕 체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지하철 내부의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무가지라도 읽고 있던 시민들이 이제는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인 함민복은 그런 모습을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12

폰 스택(Phone Stack) 게임

부자들이 스마트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사이, 지위가 낮은 이들의 스마트폰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18

자본주의사회의 마케팅이라는 것은 고객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도 필요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면 고객에게 이미 있을 것이다. 아직 안 샀다는 것은 아직 그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팀장은 고객이 물건을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식으로 눙치고 있었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멋진 단어는 그 순간부터 나에게 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

몇 달 후 신촌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료에게 수당에 얽힌 후일담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팀장은 수당을 떼어먹을 '자유'를 여러 차례 행사했고, 나만큼 집요하거나 독하지 못했던 어떤 동료들은 더럽고 치사해서 수당을 떼어먹힐 자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

자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인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칸트적 도덕률

24

등장인물의 부와 가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들어낼 것인가

- 무지. 가난에 대한 무지, 부에 대한 무지

28

두 명의 부자. 영화 <코스모폴리스>의 에릭 패커, 현실의 '집 없는 억만장자'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십대 중반까지는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후반이 되자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게 되고, 그 후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거부가 된 그는 다시 가난을 코스프레 하기 시작했다. (...)

현실의 억만장자들은 소유로부터 탈출하고 있다. 그들은 '무소유'가 가장 영리하게 부를 소비하고 현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심지어 쿨해 보이기까지 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나라의 부자들도 이제는 집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 전세 귀족들은 고가의 주택에 거주하지만 소유하지는 않으며, 무소유의 이상에 걸맞게 대부분 차도 갖고 있지 않다. 리스회사에서 빌리면 된다.

46

(영화 <신세계>)

대중은 오래전에 '가난한 아빠'를 버렸다. 그런데 믿었던 '부자 아빠'는 대중을 부자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골드만삭스나 J.P.모건으로 대표되는 이 '부자 아빠'들이 고급 사기꾼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중은 돈과 집, 직업을 잃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 강과장은 이렇다 할 분명한 윤리적 목표도 없이 오직 희생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악인처럼 보인다. 반면 정청은 이자성에게 생존의 방식과 신념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퇴장한다는 점에서 진짜 아버지의 면모를 보인다. 지금의 대중은 윤리적 생존 대신 생존의 윤리를 가르쳐줄 아버지를 선택한 것이다.

영화의 중심 서사가 사실상 모두 종결된 뒤에 영화는 마치 사족처럼 육 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이자성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 살육을 저지르고 난 후 밝은 태양 아래에서 너무나 환하게 활짝 웃는 장면은 난데없이 섬뜩하다. 그 웃음이 이 영화를 이자성의 시점에서 다시 보게 만든다. 영화 내내 희생자처럼 보였던 그가 이 모든 일의 주체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모든 일을 이미 저지르고도 시침 뚝 떼고 있는 대중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웃음은 조용히 암시하고 있었다.

 

www.cine21.com/news/view/?mag_id=74776

 

[영하의 날씨] 그가 활짝 웃던 그 순간

어떤 베스트셀러는 빨리 낡는다. 예컨대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2000년, 그러니까 아직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돈이 돈을 낳는

www.cine21.com

68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제 사십대에 다다른 셀린은 제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른 만난다면 이번에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건가요?" (...)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행동은 스물여덟 살에게나 어울린다. 그럼 사십대의 남자에게는 무엇이 어울리나?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들. 극장의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영화 보기, 달콤쌉싸름한 회고담 늘어놓기, 그러다 혼자 괜히 쓸쓸한 기분에 젖어 맥주 마시기, 그리고 글쓰기.

이십대는 몸으로, 사십대는 머리로 산다. 살아보니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

 

69

서연은 왜 승민에게 "너와 살고 싶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살 집을 지어다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는/말할 수 없는 것일까.

라캉 히스테리자 : 자신의 욕망을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주체

78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사막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정해진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시험

135

전주에서 만난 기자들이 <숏!숏!숏! 2013>에 대해 가장 많이 물은 것도 <비상구>를 원작자로서 어떻게 보았는가였다. 사실 나는 그 소설의 초고를 써놓고도 일 년 가까이 서랍 속에 두었던데다가 발표한 뒤에도 작품집으로 묶을 때 말고는 다시 들춰본 적이 거의 없었던 터였다.

"어떤 기분이냐고요? 글쎄요. 오래전에 저지르고 잊어버린 범죄를 누가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온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이미 영화를 본 기자들은 당신 마음 이해한다는 눈길로 다들 웃어주었다. 전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는 창녀다>의 감독이 단편 「비상구」 의 아슬아슬한 부분들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지나가리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독은 내가 상징적으로 처리했으면 하는 부분들만 골라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표절이라는 게 사후에 행해지니까 표절이라는 것인데 피에르 바야르는 그 반대도 있다고 능청스럽게 주장한다. 미래에 쓰여질 글을 미리 표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 먼저 썼다고 해서 주인 행세할 필요 없다는 것, 먼저 쓴 사람이 모든 책임을 다 떠안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예상 표절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영화를 보는 원작자의 마음은 한결 편해진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1997년의 김영하는 201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발표될 세 편의 영화를 '예상 표절'하여 세 편의 단편을 먼저 발표했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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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사주)

"당신은 나무입니다. 나무라서 물을 가까이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를 큰 바위가 짓누르고 있습니다. 바위가 나무를 누르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화가 나겠지요. 당신은 지금 세상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자라게 마련이고 바위는 부서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나이를 먹을수록 부드러워지고 유순해질 겁니다."

"사주에 말씀 언자가 둘이나 들어 있습니다. 말과 글로 먹고 살게 될 겁니다. 그쪽으로 가면 사십 년 대운입니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노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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