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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씨네21 김영하의 [이창] 2005년도 글모음 - 길참견, 고양이, ‘요즘 애들’이 술을 안 마시는 진짜 이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듣는 문학vs읽는 문학, 오리 外

by theASDF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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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할 땐 잘 쓰인 글을 읽는다.

나만의 취미생활.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 작가는 글을 정말 잘 쓴다. 그의 소설은 어딘가 그로데스크하고 괴기하고 어쩔 땐 불쾌한 느낌까지 들게 하지만 에세이는 다르다.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는 산뜻하고 청량하면서도 무겁고 깊다. 공감이 가면서도 궁금하고, '오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아니 어떻게?' 한다.

내가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미 그가 방송에서 여러번 말했듯)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쓸 때만이 진정한 나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를 읽을 때만 진짜 김영하 작가를 만나는 느낌인데 작가님은 정 반대라니! 믿을 수 없어.. 진짜 김영하 작가는 누구인지 밝혀낼 때 까지(?) 나는 그의 에세이를 더 찬찬히 수집해가며 읽어보기로 했다.

[이창] 길참견

글 김영하(소설가) 2005-09-09

아버지는 80년대 후반에 운전면허를 따셨다. 마이카 붐이 불어오던 시기였다. 온통 거리에 초보들이 넘쳐나던 시절. 당신도 중고차를 사서 거리의 초보 운전자 대열에 합류하셨다. 어머니를 태우고 강원도, 충청도 곳곳으로 신나게 돌아다니셨는데 가끔 논 한가운데로 부웅 날아가 사뿐히 안착하는 놀라운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셨다(깔고 앉은 벼값은 물론 물어주셔야만 했다).

어머니는 90년대 중반에 면허를 따셨다. 50대 중반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주차를 잘 못하셔서 가끔 쫙 뚫린 고속도로나 주행하시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도 운전에 있어서만은 아버지를 능가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신다.

동갑인 두분은 60대 후반이신데 이제 운전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으셨다. “눈도 침침하고 생각대로 잘 되지도 않고 기름값도 많이 들고….” 그래서 공짜 경로표를 주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신다. 그러나 이 두분이 결코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길참견이다.

일단 이 두분은 자동차 뒷자리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길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내신다. 늘 다니는 길인데도 또 새로우신 듯, 두눈을 크게 뜨고 앞을 노려보신다. 마치 길을 잘못 들면 집안이 거덜나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이다.

“조 앞에서 좌회전이다.”

“아니야. 더 가서 좌회전해도 돼.”

“이 사람이!! 여기서 해야 된대두 그러네.”

“이 양반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하야, 더 가서 좌회전해야 신호를 잘 받는다.”

두분은 모든 길이 바둑판처럼 잘 구획되어 종횡으로 이어진 신도시에 사신다. 바로 좌회전을 해도 되고 그 다음에 해도 되고 아니면 한참을 더 가서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다. 어쩌면 아예 좌회전을 안 해도 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두분은 어디서 회전을 해야 좋은지를 두고 필사적으로 다툰다. 도저히 시끄러워서 운전이 안 될 정도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단 한번도 상대방의 지시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우회전하라고 하면 어머니는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그냥 가서 유턴하면 돼”). 거의 모든 교차로마다 이런 일이 재연된다. 어머니가 유턴하라면 아버지는 우회전해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상당한 수준의 공간지각력과 기억력, 운전능력의 소유자라 자부하는 내 의견은 거의 무시된다. 심지어 이 두분은 잘 모르는 동네에 가셔서도 굴함이 없다. 표지판을 보시면서 끊임없이 의견을 내놓으신다. 다른 일에는 거의 참견 같은 걸 안 하시는 분들이 오직 자동차만 타면 돌변하신다.

그런데 두분의 길참견은 드라마틱하게, 단 한방에 완전히 종식되었다. 거금 40만원을 들여 장만한 GPS 네비게이션 시스템 때문이었다. 이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논란의 여지없이 목적지에 정확히 인도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신 두분은 하는 수 없이, 저 하늘의 신을 닮은 이 정체불명의 기기에 그 좋아하는 길참견의 역할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300m 전방에서 우회전입니다.” “1km 전방에서 안전운전하십시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간들간들한 여성적 목소리로 길안내를 할 때마다 두분은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을 달싹이시려다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 군사위성이 (손으로 위를 가리키며) 조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알려주는 거예요.” 미국이라는 국호가 주는 중압감, 인공위성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신학적 뉘앙스, GPS라는 영문 이니셜의 이국적 권위가 합세하여 두분의 그 오랜 길참견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주말, 소래포구와 분당을 오가는 내내, 내가 운전하는 차의 실내는 어쩐지 꽤나 적막하였고 오직 네비게이션 시스템 속의 ‘똑똑한 고년’(우리 어머니의 표현)만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우리는 조용히 ‘고년’의 지시를 따라 집까지 무사히 당도하였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3379

[이창] 고양이

글 김영하(소설가) 2005-09-30

집에 고양이를 키운다, 는 말 때문에 연상이 튀다가….

우선은 ‘키운다’는 말이 목에 걸린다. ‘키우다’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자라게 하다’, ‘크게 하다’ 등의 뜻인데, 새끼 때부터 데려와서 지금은 큼직해졌으니 키웠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미 다 큰 고양이들과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키운다’고 말하기는 좀 찜찜하다. 자주 쓰이는 다른 말로는 ‘기르다’가 있다. 역시 사전적으로는 ‘먹이고 보호하여 자라게 하다’인데, 다 자란 고양이를 계속 ‘기른다’고 말하기는 역시 뭣하다. ‘데리고 산다’ 정도가 가장 맞춤한 말인데, 많이 안 쓰는 말이라 그런지 입에 잘 붙질 않는다.

‘애완동물’이라는 말도 좀 그런 것이 본래 ‘애완’이라는 말에는 ‘놀음거리나 구경거리로 삼아 보거나 즐기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우리집 고양이들을 놀음거리나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집 고양이들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일각에선 ‘반려동물’이라는 말도 쓰는 모양인데 역시 어색하다.

언어보다 삶이 대체로 먼저 변한다는 점에서 어휘에는 과거의 사고방식이랄까, 하는 것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쩌면 우리 윗세대들에게 있어 동물이라는 것은 ‘어린 것을 데려와 잘 키워 잡아 먹’는 것이었을 게다. 반면 맛은 없는데 모양은 예쁜 것, 이를테면 구관조 같은 것은 새장에 넣어 ‘애완’했을 것이다. 그외에는 소처럼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예외적인 동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어휘도 동물과 함께 마음을 터놓고 정을 나누며 동등한 관계로 살아간다는 뜻을 담아내질 못한다.

‘집에 고양이가 있다’고 말을 꺼내면 가장 자주 접하는 반응은 두 가지다. ‘고양이는 말을 안 듣잖아요?’와 ‘고양이는 은혜를 모르잖아요?(주인도 몰라보고)’다. 과연 이때, ‘말을 듣는다’의 뜻은 뭘까? 설마 ‘37 더하기 24는 얼마일까요?’ 같은 말을 알아 듣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은, ‘고양이와 달리 개는 말을 듣잖아요’이고 좀더 정확히는 ‘개는 주인의 말에 복종하잖아요’가 된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개에 비해 고양이는 정말 그 어떤 말도 잘 ‘안 듣는다’. 오죽하면, ‘개는 부르면 온다. 고양이는 메시지만 받고 오고 싶을 때 온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그런데 정말 인간의 ‘은혜를 알’고 복종하는 동물만이 인간의 밥을 얻어먹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사회의 다수라는 것을 나는 매번 깨닫는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한국인은 은혜와 복종을 중시하게 되었단 말인가? 어쩌면 여기에 전세계적으로 드문 우리나라만의 ‘고양이 혐오’와 ‘개 선호’ 사상의 뿌리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종석이었던가. 한국어는 위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언어라고. 그의 말대로 우리말은 실로 섬세한 위계 체제를 가지고 있다. 극상의 높임말에서 최악의 하대까지. 군대에서 고참들이 일병 말호봉더러 ‘너 말 짧아졌다’고 윽박지를 때, 그 뜻은 ‘고참과 친해지면서 최상급 높임말이 차하급으로 내려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처지와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조심스럽게 말의 위계를 조정한다. 이런 언어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선 위계 시스템을 벗어난 그 어떤 존재와 맞닥뜨릴 때 혼란을 느낀다. 혹자는 한국인이 영어사용자만 보면 주눅드는 이유를 거기서 찾기도 한다. 한국인이 보기에 미국인들은 대뜸 ‘반말’을 한다. 우리는 대뜸 반말을 하는 사람과는 싸움을 하거나 복종을 한다. 그러니 뭐가 원만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 역시 우리의 위계 시스템과 벗어나 홀로 당당하다. 복종은커녕 툭하면 냉큼 도망가기도 한다. ‘말을 듣’는 대신 고양이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만 몸을 부비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그런 순간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양이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언어의 변경에서 배회하고 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3796

[이창] ‘요즘 애들’이 술을 안 마시는 진짜 이유

글 김영하(소설가) 2005-10-21

 

이런 말들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요즘 후배들은 도대체 술을 안 마셔. 왜들 그렇게 몸을 사리는지, 원.”

‘후배’라는 말을 신입사원, 신참, 쫄따구… 뭘로 바꿔도 다 통한다. 요컨대 ‘요즘 애’들이 술을 잘 안 마신다는 거다. 이런 푸념은 주로 누가 할까? 아마 까마득히 높은 분은 아닐 것이다. 그런 분들은 저 아래 신참들이 술을 마시든 게토레이를 마시든 별 관심이 없다. 대체로 군대에선 상병급, 회사에선 팀장급, 대학에서는 3학년쯤 되는 사람들이 신참들의 주량에 관심이 많다. 상병이 되는 데에는 1년쯤, 3학년이 되는 데에는 2년, 팀장이나 작은 회사 사장이 되려면 적어도 5년은 걸리는데, 그렇다면 그 몇 년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말 ‘요즘 애’들은 예전보다 술을 덜 마시게 된 것일까? 혹시 ‘요즘 애들’ 위장은 알코올분해효소가 예전보다 덜 분비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소한 궁금증도 잘 못 참는 나는 우선 주류 판매량 통계를 살펴본다. 이 통설을 입증하려면 젊은이들이 주로 먹는 술인 소주나 맥주의 소비가 줄거나 해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고 오히려 소주 판매량은 소폭 늘기까지 했다. 통계까지는 볼 것도 없고 신촌이나 강남역에 나가보면 ‘요즘 애들’이 술을 안 먹는다는 말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여전히 잘 먹고 잘 마시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요즘 애들이 술을 안 마신다’는 이야기를 내가 ‘요즘 애들’ 시절부터 들어왔는데 아니 그렇게 매년 눈에 띄게 후배들이 술을 안 마시는 추세가 계속됐다면, 아마 지금쯤 우리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만큼이나 술 안 마시는 나라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금요일의 도시는 언제나 인사불성이다.

그럼, ‘요즘 후배들은 술을 안 마신다’는 이 이상한 신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모 영화잡지의 전 편집장께서 흥미로운 힌트를 제공해주셨다. 편집장 시절, 그분 역시 후배 기자들이 몸을 사리는 현실을 개탄해 마지않으셨다고 한다. 1차만 끝나면 영어학원이니, 헬스클럽이니, 다른 약속이니 하며 모두 사라지는 후배들…. 아, 언제부터 언론계가 이렇게 망가졌던가! 총명한 후배들과 허심탄회하게 영화계와 언론계의 현안에 대해 밤을 새워 토론하고 싶었던 이 편집장은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후배 기자들을 원망하며 홀로 긴긴 밤을 지새워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편집장에서 물러난 뒤에 누군가가 그분에게 비밀을 속삭여주었다. 후배 기자들이 술을 안 마시긴 뭘 안 마셔? 단지 그들은 편집장과 함께 마시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눈치없이 붙잡고 늘어지는 편집장을 따돌리느라 후배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가 모처에 다시 집결하여 밤새도록 술을 펐던 것이다. 편집장이 하는 일이 뭔가? 기자들 갈구고, 기껏 열심히 써오면 빨간 줄로 죽죽 긋고, 때로는 아예 기사를 빼버리기까지 하는, 공포의 대마왕이 아닌가.

출판계에도 눈치없는 사장님들이 꽤 있다. 출판이라는 게 워낙 소규모다 보니 사장님들은 사장이 된 뒤에도 내심 자신 역시 선배 편집자(혹은 영업부원)일 뿐이라고 여긴다. 회사는 가족으로, 직원은 친척 동생쯤으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아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 생각’이다. 월급 타가는 사람들 생각은 다르다. 사장은 사장이고 데스크는 데스크고 과장은 과장이고 상병은 상병이다. 사장과 앉아서 도대체 누굴 씹는단 말인가? 결국은 사장님 훈계나 듣게 마련이다. 아니, 동료들과 모여 앉아 권커니자커니 사장 흉도 보고 뒷담화도 까는, 흥미진진한 술자리가 곧 펼쳐질 텐데, 왜 사장 앞에서 고개 숙인 채 말라비틀어진 훈제족발이나 먹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얼마 전 예의, ‘요즘 직원들은 술을 안 마신다’고 푸념하는 어느 회사 사장님께 이렇게 말해주었다. “사장님, 직원들에게 씹혀주시는 것까지가 사원복지입니다. 금일봉이나 주고 일찍 들어가서 주무세요.” 진실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당신과 마시는 게 싫은 것이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4238

[이창]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글 김영하(소설가) 2005-11-04

전국에 문예창작과가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목소리 큰 선생과 분필만 있으면 돼서 그랬을까. 하여튼 많이 생겼다. 이 문예창작과는 말할 것도 없이 문예물을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학생들은 매 학기 소설이나 시를 써야 한다. 선생들은 학생들이 작품을 쓰도록 독려한다. “써라, 써라, 써라.” 계속되는 독려에 많은 학생들이 오히려 문학에 흥미를 잃는다. 잘 하던 짓도 누가 시키면 그때부터 하기 싫어지는 게 인간이다. 반대로, 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예로부터 금서처럼 인기있는 책은 없었다. 읽지 말라면 더 읽고 싶고, 쓰지 말라면 더 쓰고 싶다. 그렇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겐 권장이 아니라 금지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혹, 이런 방식은 어떨까.

우선 문창과 학생들을 모두 기숙사에 집어넣는다. 학년에 따라 쓸 수 있는 글의 종류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예를 들어 1학년은 절대로 단편소설을 쓰면 안 된다. 만약 단편소설을 쓰다 적발되면 바로 집합이다. 선배들은 침대 밑에 숨겨둔 원고를 꺼내 후배의 면전에 들이밀며 다그친다.

“너 이거 단편 아니야?”

“아니에요. 그건 제 일기에요.”

“뻥까고 있네. 야 임마! 무슨 일기가 3인칭이야, 엉? 어쭈… 자세히 보니 플롯도 있고 분량도 80매인 게 수상쩍은데? 야, 우리가 단편하고 일기도 구별 못할 줄 알아? 엎드려뻗쳐. 1학년이 감히 단편을 써?”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쓸게요.”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창작열은 기이하게 불타오른다. 어떤 1학년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남몰래 단편을 쓰고 어떤 2학년은 방학을 틈타 장편소설을 끝낼 것이다. 1학년이 신춘문예에라도 당선되면 학교는 학생을 제적시킨다. 졸업장과 바꾼 한편의 소설, 이 얼마나 비장한가. 감방에서 문학사의 걸작이 많이 나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최근에 독서 교육에 관한 심포지엄이 많이 열리는데 늘 뻔한 소리다. 독서자격증(?)을 주자느니 독서감상문을 쓰게 하자느니 하는, 속보이는 권장의 술책뿐이다. 나는 정말 독서를 장려하고 싶으면 차라리 금지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일단 웬만한 현대소설은 다 금서로 정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도 빼버리고, 물론 수능에도 출제하지 않는다. 가방 검사에서 나오면 당장 정학이다(이건 진담인데, 나는 교육당국이 부디 내 소설 모두를 금서로 지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없던 아우라도 홀연 생겨날 것이다).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교환하며 은밀히 금서들을 돌려보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킬 것이다. 금서를 읽는 학생들은 학교의 스타가 되고 그 용감함으로 뭇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갑자기 소설은, 논술 대비용 참고 도서에서 인생을 건 모험으로 승격될 것이다. <B사감과 러브레터>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여선생을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욕설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이유로 금서다. 말이 안 돼도 좋다. 하여간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무조건 금서로 지정한다. 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선생님 눈을 피해 야금야금 금서를 훔쳐보는 시간!

그러나 나의 이런 실없는 상상이 실현될 리는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 지루하고 계몽적인 권장의 술책 말고는 대안이 없단 말인가. 터부가 사라진 사회, 뭘 해도 불온하지 않은 세상, 쓸 수 없는 것이 없고 읽지 못할 것이 없는 사회, 읽고 쓰기를 한없이 권장하는 사회, 그런데도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신이 안 나는 사회. 그게 요즘의 우리 모습이다. “문창과 학생인데요.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잘 써지지가 않아요”라며 조언을 구하는 독자에게 “선생들이 싫어할 글을 쓰세요. 그러면 아주 신나게 써질 겁니다”라고 말해주었는데, 말해놓고 보니 뜨끔했다. 어떻게든 우리는, 좀더 불온해질 필요가 있다. 가끔은 대숲에라도 나가 외쳐야 하는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4660

[이창] 듣는 문학 vs 읽는 문학

글 김영하(소설가) 2005-11-18

시는 읽는 것일까, 듣는 것일까. 예를 들어 밥 딜런이나 김광석을 (수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몇년 전 벤저민 제퍼니아라는 영국 시인이 서울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버밍엄의 빈민가에서 자라난 그는 18살 때까지 문맹이었다. 문자를 몰랐지만 그는 이미 시인이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경책을 읽어주시면 그걸 외워 교회 밖에서 랩으로 만들어 ‘낭송’했다. 그는 들었고 들은 것을 자기 리듬으로 바꿔 불렀던 것이다. 뒤늦게 영어를 배웠고, 배웠으니까 이제는 다른 시인들처럼 종이에 시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 스물두살에 첫 시집을 냈다. 그러나 주변의 누구도 그가 낸 시집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먹고살기도 바쁘고 문맹률도 높은 그 빈민가에서 누가 그 시집처럼 고상한 것을 읽고 앉아 있겠는가.

그뒤, 그는 달라졌다. 이제는 거리에서, 대영박물관에서, 골목에서,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 자작시를 낭송했다. 그의 시에는 리듬이 있어서 마치 랩처럼 들렸다. 영국의 포클랜드 침공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대처리즘에 대해 반대하고 야유했다. 라디오에 출연해 즉석시로 정치적 공격을 감행했다. 얌전히 앉아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자가 어떤 문제에 관해 물으면 그 즉석에서 시를 지어 낭송했다. 말하자면 그는 거리에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체포되었지만 그런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몇년 전 서울에 왔을 때 한국의 시인들을 정말 놀라게 했던 것은 그가 자신이 지은 시의 대부분을 외워서 낭송한다는 점이었다. 그에게는 원고가 필요없었다. 뚜벅뚜벅 무대로 걸어나가 마치 래퍼처럼 중얼중얼 흔들흔들 자신의 시를 낭독했다. 동시통역 같은 것은 집어치우라고 말했다. 카리브해 출신답게 온 몸에 배어 있는 리듬에 시어를 얹어 전달했다. 그에게 시란, 조용히 집에 앉아 시상을 가다듬고 그것을 적어 출판사에 보내고, 그러면 출판사는 그것을 묶어 시집을 내고, 작가는 서점에 나가 독자들에게 사인을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시가 쌓이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돈을 받고 시를 낭송한다. “적어도 현재의 영국에서 길을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는 시인은 아마 저뿐일 겁니다. 낭송회 입장료로 먹고사는 시인도요.” 그는 말했다. 당연히 그의 행보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길에서 즉석에서 지어 행인들 앞에서 낭송하는 것도 시냐?’, ‘저게 랩이지 시냐?’ 같은 반론은 모두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벤저민 제퍼니아를 지지하는 쪽은 “본래 시란 저런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출판된 시집을 읽는 전통은 불과 몇 백년 사이에 만들어진, 오히려 연조가 짧은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시는 입에서 입으로, 대부분은 노래의 형식을 빌려 전파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논쟁이 가능한 것도 실은 유럽의 문학 전통 기저에 ‘듣는 문학’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치르며 한국 작가들이 놀란 것 중의 하나는 낭독회마다 몰려든 열정적인 청중이었다. 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두 시간 가까이 귀기울여 듣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서점에는 책의 내용을 작가의 육성 또는 성우의 음성으로 녹음한 오디오북의 판매가 활발하다. 매출의 20%에 육박한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다. 낭독을 잘하는 작가들이 스타가 되고 낭송을 잘하는 시인은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회. 문학을 ‘듣는’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 우리 전통에선 벤저민 제퍼니아 같은 시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 혹은 시문은 전통적으로 선비들의 것이었다. 문학은 수양의 수단이었지 청중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선비들은 조용히 시를 짓고 때가 되면 그것을 엮어 문집을 냈다.

‘듣는 문학’과 ‘읽는 문학’.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의 전통이 서로 행복하게 어우러지는 어떤 접점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디오북이 팔리고 서양에선 동양의 수줍은 시인들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언젠가는 있을 것이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4939

 

[이창] 오리

글 김영하(소설가) 2005-12-02

오리,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씨네21>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홍상수 감독 영화에 나오는 오리배를 떠올릴 분이 많을 테고 요즘 뉴스 많이 보시는 분들이라면 그 무섭다는 조류독감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리궁둥이, 오리발, 오리주둥이, 오리너구리 같은 복합어들도 줄줄이 떠오른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 같은 속담도 있다. 좋은 이미지라고는 거의 없는, 한마디로 우스꽝스럽고 코믹한 이미지를 모아 만든 날짐승이 바로 오리인 것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바웃 어 보이>라는 영화에서 보면 히피 엄마를 둔 어린아이가 엄청나게 큰 빵을 호수 위의 오리에게 던져 오리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오리는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궁둥이를 물 위로 내놓은 채 떠 있다. 영화에서 동물이 죽으면 원래 슬프게 마련인데, 빵에 맞아 죽은 그 오리는 어쩐지 무척 웃겼던 것 같다. 그러니 만약 백일장 같은 데에서 누군가가 ‘오리’를 시제로 주고 뭘 쓰라고 한다면, 정말 여간한 재능이 아니고선 괜찮은 뭔가를 써낼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한 시집을 ‘건졌다’. 이윤학이라는 시인의 시집인데 만날 때마다 술에 취해 있고 간혹 안 취해 있을 때는 그런 이들이 늘 그렇듯 소심하고 숫기가 없는, 내 또래의 시인이다. 시집의 제목은 <그림자를 마신다>였다. 무심코 시집을 반으로 쪼개 펼치자 11페이지에 <오리>라는 시가 떡하니 있었다. 도대체 오리를 가지고 뭐 얼마나 대단하게 썼을까 싶어 심드렁하게 읽어나갔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걸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서 그냥, 정말 멋진 연시입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은 꾹 누르고 대신, 적어도 그의 시집보다는 판매부수가 많을 것 같은 <씨네21>의 지면을 빌려 멋진 시를 읽은 감사의 마음도 전하고, 또 이 스산한 가을을 겨우 통과하고 계신 독자 제위들께도 일독을 권하려고 한다. 전문을 인용한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런 사랑 있다. 아, 우리 이제 그만 쑤시자.

오리

이윤학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5219

[이창] 조용히 필사적으로

글 김영하(소설가) 2005-12-16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한 무리의 인간들이 조용히 필사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 구절을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필사적’이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렇다. ‘필사적’은 힘이 세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조용히’가 더 와 닿았다. 초등학교 칠판에 종종 써 있던 말이다. ‘조용히’, 이 말은 힘이 없다. 그런데 붙여놓고 보니 ‘필사적’보다 ‘조용히’가 더 필사적으로, 처절하게, 잔혹하게 느껴진다.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같은 책까지 나왔을 정도니까 그야말로 <매트릭스>에 대해서 나올 말은 다 나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화는 좀 다른 각도에서, 즉, ‘조용히’와 ‘필사적’의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미스터 앤더슨(네오)은 회사원이지만 본업인 회사원보다는 해킹에 더 열중하는, 약간 한심한 청춘이다. 일단 등장하는 순간부터 맹하다. 멍하게 졸고 있는 그에게 갑자기 세상이 와락 달려든다. 모니터에는 이상한 메시지가 뜨고 엉뚱한 사람들이 그의 지저분한 방으로 찾아온다. 회사에 가서는 상사한테 불려가 야단을 맞는다. 정리하자면 앤더슨은 ‘조용히 필사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프로그래밍도 곧잘 하는 그는 대도시의 멀쩡한 사무실로 출근하는, 크게 절박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사람이다.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 오직 가능한 모험이라곤 해킹뿐인 세상에 살고 있는 이 청춘은 그래서 낮은 대충 보내고 대신 밤에 눈을 번뜩이며 해커들의 세계를 떠돈다.

그런데 ‘도발적 사건’과 더불어 앤더슨의 이 대충대충 인생은 끝난다. 이상한 택배가 배달되고 고층빌딩 난간에서 아슬아슬한 추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스미스 요원에게 붙들린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그를 취조한다. 여기서부터 앤더슨이 발견하게 되는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조용히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이다. 스미스 요원과 그의 동료를 보라. 영화 초반, 지붕을 넘어뛰며 트리니티를 추격할 때의 그 집요함을. 이를 악문 채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게 화면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대충 버티는 앤더슨을 취조할 때는 또 어떤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다. 어찌어찌 스미스 요원에게서 탈출하면 그곳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모피어스와 트리니티 등이 살고 있는 ‘진짜 세계’. 그러나 이 세계도 앤더슨이 보기엔 역시 ‘조용히 필사적으로’ 사는 곳이라는 점에서 스미스 요원의 세계와 같다. 밥 같지도 않은 꿀꿀이죽을 먹고 괴물 같은 적들과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 정말 죽어버리기도 한다. 이건 심심풀이 해킹과는 격이 다른 삶이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매트릭스 속에서 천진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퍼 같은 자도 있다. 오직 앤더슨만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상이 ‘조용히 필사적으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세상이 이랬던 거예요?” <매트릭스>의 조연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너만 몰랐던 거야. 세상은 원래 이랬어.”

<매트릭스> 시리즈가 2편, 3편으로 가면서 별로 재미가 없어진 것은 어쩌면 미스터 앤더슨이, 아니 ‘그분’께서, ‘조용히 필사적으로’ 사시는 쪽으로 전향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편을 지배하던 내면의 갈등은 사라지고 우리의 네오는 세상의 이 쓸쓸한 이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2편, 3편에서는 그저 죽도록 싸우고 또 싸울 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네오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필사적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되도록 외면하면서(혹은 외면하다가) 그러나 실은 ‘조용히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5465

[이창] 문화적 비관주의란?

글 김영하(소설가) 2005-12-30

‘문화적 비관주의’(cultural pessimism)라는 말이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간단한 말이다. 이런 태도를 대화체로 표현하면 이렇다.

“요즘 음악들은 쓰레기야. 도대체 들을 게 없다니까.”

“음악은 비틀스로 끝났어. 그 이후로는 소음일 뿐이야.”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문호는 왜 더이상 나오지 않는가?”

“인상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은 사기다.”

“요즘 영화가 1970년대보다 나아진 게 뭐 있나? 특수효과만 발전했을 뿐.”

같은 태도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과거는 황금시대였으나 현재는 한심한 시대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더욱 퇴보하리라는 것. 별로 낯설지 않을 것이다. 사석에서 심심찮게 이런 견해들을 접할 수 있다. 이 비관주의자들은 당대의 모든 예술 장르에 적대적이다. 그들 눈에 비친 요즘 예술은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아예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들은 요즘의 문화적 생산물에 대해 무지하다.

그런데 이 비관주의적 견해들은 언제 들어도 솔깃하다. 반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현대미술을 비판하고 미켈란젤로를 옹호하는 비관주의자가 있다고 치자. 인사동 어느 갤러리에 걸린, 요즘 잘나가는 화가의 설치작품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견주어 비판할 때, 비관주의자는 전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미 검증이 끝났지만 현대의 화가는 아직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세계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의 저자, 이를테면 알베르 카뮈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를 거론하며 ‘요즘 소설들은 깊이가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의 견해에 맞서기는 어렵다. ‘깊이가 있다, 없다’ 같은 개념들이 논쟁의 어젠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자. 무엇보다도, 우리 당대의 작품들은 이제 막 생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 작품이 <이방인>만큼 오래 살아남을지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낙관주의자들은 비관주의자들에 비해 현저히 불리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과연 과거가 그토록 황금시대였는지 금세 의심스러워진다. 그때 역시 좋은 작품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마술피리>를 작곡하던 시대에 베토벤도 살았으니 황금시대로 보이지만 그 시대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됐을까. 현대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자주 모차르트가 연주되는 시대이며,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시대다. 창작의 측면도 과거에 비할 바 없이 풍성해졌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전세계 전역에서 창작되고 연주되며 음반으로 만들어져 다른 문화권으로 전해진다.

비틀스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시대를 개탄하고 과거를 그리워했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이런 일은 모차르트나 플로베르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그들이 격렬히 비난하던 시대는 어느새 ‘황금시대’로 격상되곤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젊어 한때 그토록 새로운 음악과 문학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왜 문화적 비관주의자로 변해가는가. 아마도 무엇보다 그것은 새로 생산되고 있는 당대의 문화적 생산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지를 감추는 데에는 문화적 비관주의라는 벙커가 필요하다. 이미 검증이 끝난 흘러간 시대의 대가들이 그들을 엄호해줄 것이다. ‘철없는’ 낙관주의자들은 대가들이 지켜주는 그 신성한 벙커를 부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들, 현대의 예술을 옹호하고, 당대에 생산되는 새롭고 신선한 작품들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낙관주의자들은, 그저 그 철벽 벙커를 우회할 뿐이다. 비관주의자들이 투덜거리는 동안 문화적 낙관주의자들은 안개를 뚫고 전진해나간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달콤한 비관주의를 전파할 때, 그리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옮기고 있을 때, 우리 자신이야말로 우리의 적일지도 모른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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